북녘에 관한 세계뉴스

“아베 정권의 조선학교 ‘갑질’은 가장 비열한 횡포”

최고관리자 0 387

“아베 정권의 조선학교 ‘갑질’은 가장 비열한 횡포”

‘조선학교 차별반대, 고교무상화 적용’ 도쿄 금요행동에 다녀와서

 

김희영 한음윈드오케스트라 대표  

 

해금 연주가인 김희영 한음윈드오케스트라 대표가 지난달 15일부터 ‘조선학교 차별 반대, 고교 무상화 적용 요구 금요행동 10차 참가단’ 일원으로 3박4일 동안 직접 일본에서 동포들과 연대활동하며 느낀 소감을 보내와 소개한다. 10차 참가단은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우리학교시민모임. 공동대표 손미희)이 주관했다.[편집자]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물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지난달 17일 일본 도쿄조선중고급학교 대강당. 이 학교 18회 문화제 행사 중 합창단이 ‘임진강’을 부르기 시작하자 대강당을 가득 메운 1000여 관객들이 약속이나 한 듯 노래를 따라 부른다. 노래가 끝난 뒤에는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대강당에 울려 퍼졌다. ‘조선학교 차별 반대, 고교 무상화 적용 요구 금요행동 10차 참가단’(금요행동 참가단) 일정에 동참한 24명의 마음은 모두 울음바다가 됐다.

 

▲ 도쿄 조선중고급고급학교 대강당. 고등부학생들이 문화제 행사로 전통악기로 연주를 하고 있다.[사진제공 : 김희영 대표]

 

흔히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으로 불리는 재일동포 1세대의 출신지는 제주도 50%, 경상도 40% 등으로 95%가 남쪽 출신이다. 주로 1930년대부터 한국전쟁기까지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 없는 시대적 혼란 속에서 생계와 가족 보호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온 사람들이다. 역사는 이들에게 가혹하리만치 얄궂은 존재였다.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재일동포들은 고향인 남녘땅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이런 회한과 한탄을 표현한 노래가 ‘임진강’이다. 임진강은 한강의 제1지류로서 남북을 관통해 흐른다. 노동자, 농민 등을 대표한 금요행동 참가자 대부분은 재일동포를 북한(조선) 국적자, 조선학교는 이북 교육을 가르치는 곳이라는 피상적 관념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조선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민족적 설움에 순식간에 감정이입이 됐다.

 

10차 금요행동은 ‘우리학교와 아이들을 지키는 시민모임’(우리학교시민모임. 공동대표 손미희)이 주관했다. 2014년 6월13일 발족된 우리학교시민모임은 그해 11월부터 문부과학성 앞에서 열리는 ‘고교 무상화 차별 정책’ 폐지를 요구하는 조선학교 학생들 집회에 동참 중이다. 국내에서는 매주 금요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1인 시위ㆍ피케팅과 함께 기자회견을 진행해 오고 있다.

 

5490_11147_3420.jpg
▲ 우리학교시민모임 회원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금요행동을 하고 있다.

 

고교 무상화 제도는 2010년 4월 일본 민주당 정권이 외국인학교를 포함, 전 일본의 고등학교에 도입한 정책이다. 하지만 2012년 말 집권한 아베 내각은 이듬해 2월 이북과 조총련의 밀접한 관계와 학교 운영의 적정성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외국인학교 중 조선학교만 고교 무상화 제도에서 배제했다. 이에 조선고급학교 10개교 중 오사카, 아이치, 히로시마, 후쿠오카. 도쿄의 조선학원과 학생들이 무상화 배제 취소소송과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현재 소송이 진행 중이다. 유엔사회권규약위원회는 2013년 5월 “일본 정부의 조치는 차별”이라고 규정하고 “고교무상화 프로그램을 조선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에게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등 차별 조치 시정을 요구하는 안팎의 압력은 고조되고 있다.

 

금요행동 참가단은 일본 방문 첫 일정으로 지난달 15일 오후 3시 참의원에 들렀다. 문부과학성 실무자 2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참가단 일행은 고교무상화 차별정책에 강하게 항의했다. 강선희 전국농민회총연맹 부경연맹 정책위원장은 “일본이 돈이 없어서 조선고급학교에 무상화 지원을 하지 못하고 있냐”며 “아베 정부의 돈 갑질이 가장 힘없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자행되고 있는데 이는 가장 비열한 횡포”라고 비판했다. 이번 금요행동에는 처음으로 일본 국회의원 4명이 함께해 고교 무상화 차별 철폐 투쟁에 힘을 실어줬다. 사회민주당 후쿠시마 미즈호 참의원 의원은 “모든 일본의 고등학교가 무상화 혜택을 받는데 조선고급학교만 제외된 것은 행정이 만든 차별이다. 국회 안에서 초당파적으로 힘을 합쳐 조선고급학교의 무상화 실현을 위해 함께 노력하겠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일본의 진보적 정치인들도 교육의 관점이 아닌 정치의 관점으로 조선학교를 바라보는 일본 정부의 부당한 행태에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에 대한 성토가 한 시간 동안 이어진 후 손미희 공동대표가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문부과학성 실무자들은 “항의 내용을 정부에 잘 전하겠다”는 의례적인 말만 반복했다. 소송이 진행 중이라 사법부 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일관된 모양새다.

 

5490_11148_3530.jpg
▲ 일본 참의원회관 회의실에서 후 문부과학성 담당자와 면담 후 항의서한을 전달하고 있다.

 

오후 4시 문부과학성 앞에서 조선학교 고급부, 조선대학교 학생, 일본인들로 구성된 시민단체 ‘조선학교 고교 무상화 연락회’, 금요행동 참가단 등 100여명이 함께한 집회가 열렸다. 고교 때부터 피해를 입은 조선대학교 학생들은 벌써 100여 차례 넘게 집회를 가졌다. 집회 참가자들은 부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조선학교 차별반대’, ‘고교 무상화 적용하라’, ‘조선학교에도 배울 권리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일본 정부를 규탄했다.

 

하지만 이날 금요행동 참가자 환영만찬에서는 분위기가 밝았다. 4.27 판문점선언과 6월12일 북미정상회담으로 정전 상태인 남북이 평화체제로 이행하게 되면 조선학교 차별 반대운동 국면이 더 유리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남북미 간 평화협정으로 동북아 질서가 안정되면 아베 정권이 궁지에 몰리고 결국에는 정권교체가 이뤄져 조선학교 차별정책이 폐지될 것이라는 낙관론에 희망을 거는 듯했다.

 

5490_11149_360.jpg
▲ 조선대학교 학생들이 문부과학성을 바라보며 조선학교 차별반대, 고교무상화 적용을 요구하는 금요행동을 하고 있다.
5490_11150_3638.jpg
▲ 문부과학성 앞에서 금요행동 참가단이 학생들과 재일동포들에게 연대와 격려의 인사를 하고 있다.

 

조선학교 사수를 위한 재일동포들의 투쟁은 70년을 넘는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재일동포들은 고국으로 돌아가는 날을 꿈꾸며 아이들에게 우리 민족의 말과 글, 역사를 지키기 위해 조선학교의 모태인 국어강습소를 세웠다. 재일동포들이 돈과 노력, 지혜를 짜내 모으면서 이듬해인 1946년에만 500개가 넘는 학교가 세워졌다. 조선학교가 눈엣가시였던 일본 정부는 미군정 묵인 아래 조선학교를 강제 폐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반발한 오사카 재일동포들을 중심으로 1948년 ‘4.24 한신교육투쟁’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다쳤고 수많은 학교들이 폐쇄됐다. 이때 16세인 김태일 군이 숨지기도 했다.

 

5490_11151_377.jpg
▲ 김태일 학생의 묘소 앞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듣고 있다.

 

조선학교는 1949년 강제 폐쇄되면서 학생들이 일본 학교로 편입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1955년 다시 부활했다. 학교 운영 초기 재정 위기에 처했을 때 이북이 1957년 2억엔이라는 거액을 지원하면서 학교 운영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조선학교에서는 북은 조국이고 남은 고국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현재 조선학교는 유치원 38곳, 초급부 53곳, 중급부 33곳, 고급부 10곳, 대학교 1곳이 있으며 8000명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5490_11152_3749.jpg
▲ 1948년 조선학교 강제 폐쇄에 저항하여 학교에서 농성을 하다 경찰들의 강제 진압으로 어린 학생들이 먼저 끌려 나오고 있다.

 

16일에는 사이다마현에 있는 조선초중급학교를 방문했다. 환하게 웃으며 방문단을 맞이한 정용수 교장은 자신을 ‘동래 정씨’라고 밝히며 방문단이 학교 구석구석을 둘러볼 수 있게 했다.

 

오전 11시 조선초중급학교 학생들이 모인 대강당에서 필자와 장순향 한양대 무용학과 교수는 해금과 춤 공연을 선보였다. 이번 금요행동에는 예술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민족춤협의회 이사장인 장순향 교수와 해금 연주자인 필자가 참여했다. 필자의 ‘홀로 아리랑’ 연주에 조금씩 노래를 흥얼거리고 어깨들 들썩이던 학생들은 학교 종소리이기도 한 ‘고향의 봄’을 연주하자 함께 노래를 부르고 박수로 박자를 맞췄다. 아리랑은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한민족의 동질감을 확인시켜 주는 매개체였다. 한국의 전통무 명인인 장 교수의 살풀이춤을 처음 본 학생들은 전통 춤의 절제된 손놀림과 유려한 몸짓을 보며 황홀경에 빠진 모습이었다. 공연 후 학생들과 금요행동 참가단이 서로 궁금한 점에 대해 문답하는 시간이 있었다. 아무래도 공식적인 자리여서인지 통일 위주로 대화가 오가면서 다소 딱딱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하지만 학생들과 만났을 때 편하게 얘기를 나눠 보니 K-팝 등 한류에 매우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날 오후에는 아라카와당 추모비에서 관동대지진 때 일본 자경단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재일동포들의 넋을 기리는 씻김굿이 있었다. 원혼을 달래는 장순향 교수의 처절하고 애통한 몸짓에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필자는 공연 후 금요행동 참가단에 “씻김굿 반주 도중 물 속 원혼들이 나를 강하게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고 느낌을 전했는데 모두 놀라워했다. 궁금해 이유를 물어 보니 설명은 이랬다. 공연 준비 때문에 필자는 못 들었지만 나머지 참가단은 일본인 시민운동가를 통해 들은 사전 설명이 있었다. 많은 조선인들이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자경단을 피해 강가로 도망쳤고 대부분 물속에 숨어 있었다. 하지만 3분을 버티지 못하고 숨을 쉬기 위해 물 위로 나오다가 총에 맞거나 둔기로 맞아 숨졌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런 사실을 모른 상태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금요행동 참가자들은 원혼들이 추모 공연을 통해 억울함을 풀었을 것이라며 필자를 토닥였지만 한 번 무거워졌던 내 마음은 쉽사리 가벼워지지 않았다.

 

5490_11153_3820.jpg
▲ 아라카와당 추모비 앞에서 장순향 교수의 춤과 필자의 해금 연주로 원혼을 위로하고 있다.

 

17일 도쿄조선중고급학교에 도착했다. 학생들은 손수 준비한 음식과 한반도 통일을 기원하는 티셔츠 등을 팔았고, 공연이 예정된 학생들은 각자 악기와 무용에 필요한 장비를 들고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남녘 종편채널에 나온 삼지연극단의 공연 영상을 털어놓는 등 4.27 판문점선언의 긍정적 영향이 학교 곳곳에서 시원스레 펼쳐졌다. 태권도 시범, 여러 소품을 이용한 무용 등이 이어졌고, 금요행동 참가단도 무대에 올라 ‘아침이슬’을 불렀다. 점심시간에는 엔화를 바꿔 쿠폰을 산 후 여러 가지 음식들을 사 먹었다. 시원하면서도 묘한 국물 맛의 랭면과 웬만한 서울의 꼬치집보다 맛있는 닭꼬치가 불티나게 팔렸다. 점심을 먹은 후에는 학생들이 손수 만든 통일여권을 발급받아 제주도, 백두산, 경주 등으로 꾸민 교실을 방문해 기념사진을 찍고 통일 의지를 다졌다.

 

5490_11154_3911.jpg
▲ 금요행동 참가단이 학생들로부터 통일여권을 발급받으며 환히 웃고 있다.

 

오후 대강당 공연은 오전보다 더 화려했다. 장고춤, 학부모 중창, 오케스트라 연주 등등. 모든 공연이 끝난 후 필자는 울컥한 마음을 다잡으며 대강당을 나왔다. ‘우리가 왜 저들과 단절돼 살아왔어야 했는지’를 고민할수록 마음이 너무 아팠기 때문이다.

 

서경식 도쿄경제대학 교수는 도서출판 ‘선인’이 내놓은 책 <차별을 딛고 꿈꾸는 아이들, 조선학교 이야기> 추천사 중 조선학교와 재학생들에 대한 응원과 연대를 부탁하며 이렇게 썼다. “당신이 과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긍정하지 않는다면 현재도 계속되는 식민지 지배를 용인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조선학교는 항상 식민지 지배 책임을 부인하고자 하는 일본 지배층들에 상징적인 표적이 되어 왔다. 그 압력에 대한 저항은 조선반도 남이든 북이든 재일이든, 분단 이데올로기를 넘어 전 민족적으로 공유해야 할 과제다. 학생들이나 부모들에게 그런 자각이 있는지 없는지를 떠나서, 조선학교는 이 투쟁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최전선에 선 사람들을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 DJ정부 때 물꼬를 튼 남북 문화예술교류로 조선학교 학생들의 사정을 나름 안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금요행동 참가로 그들의 민족적 설움을 뼈저리게 느낀 소중한 3박4일이었다.

 

 

[출처: 현장언론 민플러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