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북한의 협동농장④ – 농업협동화의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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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협동화가 실질적인 농업 생산량의 확대로 이어지지 못하면 농업협동화가 절대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 국가의 많은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의 문제점으로 ‘농업협동화로 인한 생산성 하락’을 꼽는다.

그렇다면 과연 농업협동화가 가속화되던 시기, 그리고 그 이후 북한의 농업생산량은 얼마나 많아졌을까.

우선 1954년, 1955년 2년간 경지면적이 3만 7,700여 정보(총 몇 평, 여의도와 비교)가 확장된다.

이러한 대규모 경지면적 확대는 협동농장이 주도하여 농지개간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알곡(쌀, 보리, 콩, 밀 등)생산이 1954년에 비해 1955년 104%, 1956년 123%(287톤), 1957년 320만톤, 1958년 370만톤으로 점차 증가했으며 1956년 협동조합에 소속된 농가당 배분량이 그 전해에 비해 알곡이 129%, 현금이 170%로 성장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농업협동조합 수입분배 ⓒ국가기록원

이후 농업협동화는 북한의 급속한 농촌현대화, 기계화라는 결실로 나타났다.

1960년대부터 농업기계화 본격 착수하여 1956년에 비해 근 2배 증가해 같은 기간 농촌에서는 트랙터 총 대수가 4.2배, 작업면적이 10배 증가하게 되었다.

1960년에는 1956년에 비해 토지이용률이 138에서 174%로 늘어났으며 또한 논벼와 옥수수 면적이 110만 1천 정보에서 128만 4천 정보로 확장하게 된다.

1960년대 당시 380만 3천 톤에 달하는 생산 수준을 기록했는데 5개년계획 목표는 376만톤으로 목표를 초과달성한 것이었다.

그리고 농촌의 전기화가 실현되었는데 1961년 북한에서는 이미 전체 농촌 리의 92.1%, 농가 호수의 62%에 전기가 들어가고 있었다.

목축업도 공동축산을 기본으로 조합원들의 개인 축산도 결부했는데, 1960년에는 1956년에 비해 소의 두수가 139%, 면양과 산양은 2배 이상, 되지는 158%, 토끼는 약 18배 증가하는 성과를 냈다.

과수업에서 협동화로 10만 정보의 과수업 개간사업이 실현되어 과일 총생산량이 3.6배 증가하게 된다.

농업기계화를 빠르게 실현한 북한은 1960년대부터 명실상부한 사회주의 공업국가 진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 참고개인이 운영하던 상점가게 등은 어떻게 되었을까?

현재 북한은 모든 중소상공업을 국가 및 협동조합이 운영하고 있다.

해방 후 개인이 운영하던 상점들이 어떻게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일까?

북한에서는 농업협동화와 더불어 상공업 협동화도 동시에 추진하였다.

개인상공업의 사회주의적 개조는 이미 전쟁 전부터 시작되었다.

1947년 9월 최초로 생산합작사 형태로 출발한 생산협동조합이 1947년 말 28개, 1949년에는 567개로 늘어났고, 조합원도 77배로 증가했던 것이다.

그 결과 1949년 말에는 이미 전체 개인상공업에서 협동조합의 비율이 22.5%로 늘어났으며, 전체 공업생산량의 5.2%를 담당하고 있었다.

1949년 시점에서 인구 구성상 개인상공업의 비중이 기업가 0.15%, 수공업자 0.8%, 상인 1.75%에 불과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비중은 더욱 낮아져 1953년 7월에는 개인기업가 0.1%, 개인수공업자 0.6%, 개인상인 1.1%로 떨어진 상태였다.

개인상공업의 협동화는 농업협동화 제2단계인 대중화단계에서 전면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리고 농업협동화가 마무리되는 시점과 비슷하게 완료되었다.

개인상공업자의 23.4%는 자신의 사업을 국가에게 기부하면서 국영 부문의 노동자, 사무원으로 이동했고 76.6%는 협동조합을 꾸렸다.

개인상공업의 개조과정도 농업협동화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자원성의 원칙에서 진행되었고, 세 가지 형태의 협동화 방식을 취했다.

제1형태는 지극히 영세한 수공업자를 대상으로 한 협동생산반이었다.

함께 협동해서 일을 하는 형태에 불과했다.

제2형태는 개인 수공업과 자본주의적 상공업을 망라해 진행했는데, 생산수단과 자금을 통합하여 공동경영하는 형태였다.

수익은 노동에 따른 분배를 원칙으로 하고 출자금에 따라 분배를 조정했다.

즉, 개인의 생산수단 및 자금을 ‘개인 소유’로 보장한 것으로 일종의 ‘협동경영’이었다.

제3형태는 생산수단과 자금이 완전히 조합의 공동소유가 되고, 수익은 노동에 따라 분배하는, 완전한 사회주의적 형식이었다.

공동소유를 하는 과정에서 생산수단과 자금은 모두 조합의 적립금을 이용하여 출자한 개인에게 나누어 지불된 상태에서 출발했다.

협동화가 끝난 1년 후인 1959년 10월, 560여 개의 생산협동조합 가운데 제2형태가 38%, 제3형태가 62%가 되었다.

서서히 개인 상공업자들의 요구성에 따라 형태를 사회주의적 형식으로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NK투데이 편집부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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