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특집①] 개성공단, 왜 급속히 성장했을까?

최고관리자 0 50

최근 남북관계가 복원되면서 개성공단 재가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개성공단은 2010년 이명박 정부의 5.24조치 때도 폐쇄되지 않았던 ‘유일한’ 남북교류의 불빛이었다.

많은 남측 기업들이 개성공단을 통해 큰 수익을 얻었다. 따라서 남북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도 폐쇄되지 않다가 결국 2016년 박근혜 정부 때 가동이 중단되었다. 이후 개성공단 피해액이 4조원에 달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개성공단 복원에 대한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져왔다.

남북교류가 진행되면서 개성공단 재개가 임박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개성공단의 재가동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개성공단의 가치는 과연 얼마나 되며 발전전망은 어떻게 될까? 그리고 개성공단 모델이 더 확대될 수 있을까? 남북경협은 향후 어떻게 가야할까?

이번 글에서는 개성공단의 간단한 역사와 그 가치, 발전전망, 남북경협의 청사진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개성공단의 역사

개성공단은 남측의 자본과 기술, 북측의 토지와 노동력을 결합해 남북 공동의 번영을 추구해보자는 취지로 시작되었다.

2000년 8월 현대아산(주)와 북한이 《공업지구 건설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면서 개성공단은 시작되었다. 2002년 11월에는 북한에 개성공업지구법이 제정되었다. 법적으로 개성공단 건설 및 운영을 공고히 한 것이다.

현대아산과 LH공사가 자금 조달 및 설계, 시공을 맡기로 하고 착공식을 가진 것은 2003년 6월이었다. 한동안 시범단지를 운영하다가 2005년부터 전력을 공급하면서 본격적으로 개성공단은 문을 열었다.

처음 입주 업체는 24개에 불과했다. 당시 기업들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남북교류에 불안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통신이 연결되고 제품들의 반출이 시작되면서 개성공단은 급속히 성장한다. 1년 만에 1만여 명에 달하는 북측 노동자들이 일하는 대규모 공단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가동 2년도 안되어 2007년 1월 개성공단 누계생산액이 1억 달러(1천억원)를 돌파했다. 그리고 입주기업이 8배 확대되었다. 총 184개의 기업이 개성공단에 입주하게 된 것이다. 그만큼 기업들이 ‘들어가고 싶은 공단’이었다.

2007년 12월에는 문산역-판문점역 간 화물열차 운행이 시작되었다. 개성공단 물자 유통에 효율성을 더했다고 한다. 남측에서는 공사용 경계석, 신발 원부자재 등을 북측에서는 주로 신발, 의류, 유압실린더 등 개성공단에서 생산한 완제품을 실어날랐다.

화물열차 운행은 한국전쟁으로 경의선 운행이 중단된 지 56년 만에 이뤄진 것이었다. 인천에서 남포까지 2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를 나르면 기존의 해상 운행보다 기간은 엿새 이상, 운임은 500달러 이상 절감되었다. 물류운송비의 절약은 개성공단의 수익 창출에 더 큰 보탬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집권 1년도 안 돼 열차는 중단되고 말았다.(2008.11.28.)

정치적 악조건에서도 개성공단은 2008년 7월 누계생산액 4억, 11월 5억, 2009년 5월 6억에 이어 2010년에는 누계생산액 10억 달러(1조원)를 돌파하게 된다. 개성공단 가동 5년 만에 이룬 성과였다. 그리고 다시 3년 만인 2013년 1월에는 개성공단 누적생산액 20억 달러(2조원)을 돌파하게 된다.

엄청난 속도였다.

2. 개성공단 성공의 비결

그렇다면 개성공단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2005년 시작 때부터 개성공단에 입주해서 제2공장까지 확대했던 (주)대화연료펌프라는 회사가 있다. 대화연료펌프는 개성공단에서 기계식 연료펌프의 70%와 오일필터의 90%를 생산했다. 자동차 부품으로 세계 1위였다.

(주)대화연료펌프 유동옥 회장. ⓒNK투데이

대화 유동옥 회장은 개성공단이 “지구상 가장 경쟁력 있는 공업지구”라고 주장하면서 그 성공비결을 공개했다.

그 근거로 꼽은 것이 바로 북한 노동자들의 우수한 실력이었다.

당시 대화연료펌프의 북한 노동자들 중 대학 졸업자는 35%에 달했다고 한다. 북한에 대학 졸업 비율이 그리 높지 않다는 것(2~30%)을 감안할 때 북한이 개성공단에 실력이 있는 기술자, 노동자들을 상당히 파견한 셈이다. 유 회장은 북한 노동자들이 손재주가 좋아 숙련속도는 빠른 편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료들 간의 협력도가 높은 것도 지적했다. 북한 노동자들이 치열한 비교경쟁사회가 아닌 환경에서 성장해 왔기 때문인지 성격은 대체로 착한 편이고 부서별 결속력이 강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유 회장은 개성공단의 생산성이 한국과 유사하며 중국이나 베트남 등 해외공장보다 더 높다고 진단했다.

사실 유 회장은 애초 미국 진출을 꿈꾸고 있었다고 한다. 현대차가 진출한 미국 앨라배마에서 수차례 찾아와 명예 시민증과 공장 부지의 무상 제공, 파견 직원 자녀의 대학 장학금 제공 등 뿌리치기 어려운 좋은 조건을 내걸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유 회장은 최종적으로 개성을 택했다고 한다. 그만큼 개성공단이 메리트가 있다고 봤던 것이었다.

한 때 개성공단이 가동되던 시기 우리가 입는 옷의 약 30%, 속옷의 90%을 생산되고 있었다. 알디앤웨이(등산화)를 비롯해 나인(내의류), 한식품(식자재), 베스트프렌드(아동내의), 성화물산(골츠양말), 디엠에프(청바지), 석촌도자기(식기류), 서도산업(패션소품), 로만손(시계류), 에스제이테크(가방·지갑) 등 수많은 기업이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쓰는 제품들을 개성공단에서 제조하고 있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바로 높은 생산성에 결부된 낮은 임금 떄문이었다.

개성공단 노동자들에게 지급되었던 임금은 월 13~15만원 선이었다. 최저임금은 74달러 정도로 월 8만원. 여기에 사회문화시책비(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와 특근·야근수당까지 결합해서 월 13~15만원 선에 불과했다.

개화 유회장에 따르면 한국 노동자들의 1/10~1/20에 불과한 임금을 지급하고도 한국 노동자들을 고용한 만큼의 생산성을 낸 셈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싸게 임금이 책정되었을까? 
4년간 개성공단에 체류하며 대북협상을 담당했던 김진향 현 개성공업지구재단 이사장은 당시 협상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노동자의 월급은 2004년 50달러로 출발했다. 남측이 제시한 200달러를 25% 수준으로 내린 것이었는데 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지시한 것이었다. 개성공단을 빨리 성공시켜 제2, 제3의 개성공단을 만들어 실질적 경제공동체로 나아가야 남과 북의 평화를 구조화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즉, 한국은 최저임금을 200달러(월 22만원 선)으로 제안했는데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파격적으로 1/4만 받기로 결정해 월 50달러(5만 2천원정도)로 합의를 이룬 것이다. 실제 북한이 전 주민들을 대상으로 식량배급제를 시행하면서 무상의료·무상교육·무상보육·무료주택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히 손해 보는 결정을 한 셈이다. 개성공단 노동자들의 생계 전반을 남측 기업가들이 아닌 북한 정부가 담보한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 북한과 남한 사이에 임금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현재 북한 주민들이 평균적으로 북한돈 월 5만원(한국돈 50만원) 정도의 임금을 받으면서 전반적 무상혜택을 누리고 있음을 감안해 본다면 어떻게 보면 북한 정부는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2017년 4월 1이 연합뉴스에 따르면 북한 해외 파견 노동자들의 월급은 1인당 600~1천달러(약 67만2천~112만원) 수준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북한은 남한이 제시한 월급의 1/4 정도로만 받겠다는 파격적인 결정을 하면서 개성공단에서 수많은 남측 기업들이 성과를 낸 것이다. 실제 북한 노동자들의 숙련도까지 높았기 때문에 남측 기업의 생산성 역시 급속도로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계속)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