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청산③ - 북으로 간 강동원의 외증조부는 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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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우리 민족의 염원은 친일 청산이었다.

친일 청산은 단순히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를 심판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조선사회에 만연했던 일제 잔재 전반을 청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친일 청산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북한에서 친일파를 숙청했다는 것 정도는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구체적인 시행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북한에서 친일청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친일파 청산 과정과 사회문화적 일제 잔재 청산 두 부분으로 확인해보도록 하자.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 노덕술.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친일파 경찰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냈다. 출처 : 인터넷.

 

[목차]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1. 해방, 그리고.

2.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출범

3. 중앙기구 차원에서 진행된 친일청산

 1) 재판소 사법절차에 따른 처벌

 2) 정치적, 경제적 조치 
  ① 토지개혁    ② 친일재산의 국유화와 노동자 자주관리 ③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 ④ 그 외  

4.친일파규정

 1)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2) 정준택, 이활, 그리고 이광수

5.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6. 일제유산 청산

7. 북한 친일청산의 특징

 1) 천편일률적이지 않았던 친일파 청산

 2) 친일파 청산만큼 중요하게 바라봤던 일제유산 척결운동

 3) 대중이 주인되었던 일제 잔재 청산

8. 친일청산의 결과

 


-계속-

4. 친일파 규정

그렇다면 친일청산 과정에서 친일파 규정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친일청산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어떤 사람을 친일파로 규정할 것인가'를 정하는 문제였다.

"협력행위에 가담한 자들을 어느 선까지 친일파로 규정해야 할까?"라는 이 쉽지 않은 질문은 해방 직후 심각한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

토지개혁, 산업국유화가 진행될 때까지도 명확하게 마련된 규정이 마련되지 못하다보니 지역인민위원회에서 자체적인 판단에 의해 친일파를 규정하기도 했고 대중들의 판단에 의해 재판과 처벌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그러다 1946년 3월 7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을 제정하였다. (류석춘, 김광동, "북한 친일청산론의 허구와 진실", 격월간 시대정신, 2013년 봄호, 부록1)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1. 일제의 침략당시 조선민족을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팔아먹은 매국노와 그 관계자 
2. 귀족칭호를 받은 자, 중추원 부의장 고문 및 참의, 일본 국회 귀족원과 중의원의 의원
3. 악질고관(조선총독부 국장 및 사무관, 도지사, 도사무관, 도참여관) 
4. 일제경찰 및 헌병 고급관리(경찰경시, 헌병 하사관급 이상) 사상범 담임판사와 검사
5. 고등경찰 중 악질분자(인민의 원한의 대상이 된 자) 
6. 고등경찰의 밀정책임자와 밀정 
7. 해내외 민족운동자와 혁명투사들을 학살 또는 박해한 자와 방조한 자 
8. 도회의원 및 친일단체 파쇼단체(일진회, 일심회, 녹기연맹, 대의당, 방공단체 등) 간부와 악질분자. 
9. 군수산업의 책임경영자 및 군수품조달 책임자로 악질분자. 
10. 일제의 행정, 사법, 경찰기관과 관계를 가지고 만행을 감행하여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으로 된 민간악질분자 
11. 일제의 행정, 사법, 경찰의 관공리로서 인민들의 원한의 대상이 된 악질분자 
12. 황국신민화운동을 전개하여 지원병, 학도병, 징용을 실시하는데서 이론적 정치적 지도자로서 의식적으로 행동한 악질분자 
13. 8.15 해방 후 민주주의적 단체를 파괴하며 또는 그 지도자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였거나 테러단을 조직하고 그것을 직접 지도한 자와 그와 같은 단체들을 배후에서 조종한 자 혹은 테러행위를 직접 감행한 자 
14. 8.15 해방 후 민족반역자들이 조직한 반동단체에 의식적으로 가담한 자 
15. 8.15 해방 후 민족통일전선을 방해하는 반동단체의 밀정 혹은 선전원으로서 의식적으로 밀정행위를 감행한자와 사실을 왜곡하여 허위선전을 한 자.

부칙: 이상의 조항에 대당한 자로서 현재 나쁜 행동을 하지 않는 자와 건국사업을 적극 협력하는 자에 한하여서는 그 죄상을 감면할 수도 있다.

1946년 3월 7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이 법령은 친일파의 범위를 규정하고 토지개혁, 중요산업국유화 등의 친일청산사업을 추진할 때 적용되었다.

그리고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말~1947년 봄 진행된 인민위원회 선거 당시 선거권을 제한시킬 친일파를 다음 6가지로 규정했다.([면·군·시·도 인민위원회에 대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제2차 확대의원회의 결정서] [북한관계사료집 5], 국사편찬위원회, 1987, 25~27쪽.)

  1.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 고문 전부
  2. 도회의원, 부회의원 조선인 전부
  3. 조선총독부 및 도의 책임자로 근무한 조선인 전부
  4. 경찰, 검사국, 판결소의 책임자로 근무한 조선인 전부
  5. 자발적 의사로서 일본을 방조할 목적으로 일본 주권에 군수품 생산, 기타의 경제 자원을 제공한 자
  6. 친일단체의 지도자로서 열성적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방조 활동한 자. (다음의 규정들은 민족문제연구소가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 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쫓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했던 점에서 상당히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친일파 개념에 따르면 현재 한국에서 칭송받고 있는 고려대학교 설립자 김성수, 이화여대 초대총장 김활란 등의 경우 5번, 6번에 해당하여 친일파로 규정된다.)

이 규정에 제시된 친일파는 앞서 3월에 발표된 '친일파, 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의 친일파들 중에서도 '죄질이 나쁜 것'으로 분류된 사람들이었다.

1946년 11월 3일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모습. 출처 : 인터넷.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파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오를 수 없을 정도의 높은 관직에 있었던 자들을 명확히 친일파로 규정했다.

그리고 직위의 고하를 떠나 관직의 성격과 개인의 행적 역시 친일파 판별의 기준으로 되었다.

특히 항일운동가들의 연행, 고문, 형 집행 등을 담당했던 고등경찰 종사자들은 모조리 친일파로 규정되었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195쪽.) 

물론 예외사항은 있었다.

친일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죄를 깊이 반성하고 해방 후 '조선민족을 위하여 살겠다는 결심'을 하면 건국사업에 함께 할 수 있었다.

이는 해방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돼온 각계의 제안을 수용한 것으로 일종의 '포용정신'을 발휘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1946년 1월 31일에 열린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북조선연맹 결성대회 자료에는 "인민정권수립"에 협력할 수 있다고 인정되는 이들에게까지 일제시기의 관리였다는 점을 문제삼아 “민족반역자로 규정해 배척하는 태도를 경계하자”는 대목이 나온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196쪽.) 

대중단체 회의에서 그러한 입장들이 등장했을 정도로 “친일파는 무조건 숙청하자”는 논리가 대중들에게 설득력이 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선거권·피선거권 제한 역시 친일파로 판정된 장본인에게만 철저히 적용되었다.

친일청산이 친일행적을 가진 사람의 가족들에게까지 절대 확대적용하지 않은 것이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201쪽.) 

이러한 흐름은 38선 이북 지역의 친일파 개념 정립작업이 나름의 합리성을 띄고 진행되었음을 의미한다.

2) 정준택, 이활, 그리고 이광수

일제 시기 일본에 협력했던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의 죄를 반성하면 반민족 행위자로 간주되지 않고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인재로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일제 시기 기술전문직에 종사했지만 38선 이북지역에서 청산당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로 정준택, 이활이 있다.

정준택은 일제강점기 당시 화학공장 과학자로 1943년 4월부터 광산을 경영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해방후 정준택은 자신의 죄를 반성하면서 과학기술로서 건국사업에 이바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였고 북조선 행정10국 산업국장을 맡아 38선 이북지역 공업 발전에 기여했다.

내각부수상까지 역임했던 정준택은 건국사업에 끼친 노력이 인정받아 사망 후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김일성 주석과 정준택 내각부수상의 모습. 출처 : 월간 조국.

이활 역시 일본 해군에서 비행사로 근무했던 인물이었다.

해방 후 이활은 건국사업, 특히 건군사업에 적극 기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조선인민군 비행사단 부사단장으로 북한 공군창설에 크게 이바지했다.

사진 중간에 김일성 주석. 앞줄 왼쪽에 비행사 이활. 출처 : 인터넷.

또한 연예인 강동원의 외증조부로 알려진 이종만의 경우 비록 일제에 협력한 자본가였지만 해방 후 '독립신보'를 간행하고 남북통일협상을 적극 지지한 점, 북한의 광업부 고문으로 재직하면서 여러 지역을 탐사하여 자원개발에 기여한 점 등을 인정받아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힌 유일한 자본가가 되었다.

이렇게 38선 이북지역에서 전문기술자들을 적극 발탁한 이유는 ‘친일파들에 대한 분노해소와 처벌’보다는 ‘새 조국 건설’에 더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죄를 저지른 인물이여도 지금 이 순간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가 기본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기준으로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북한이 현재 친일문학가 이광수를 바라보는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말년에 이광수가 친일 과오를 뉘우쳤으며 한국전쟁 후 월북을 선택했다고 한다.

북한으로 가던 중 폭격으로 사망한 이광수를 북한은 초기 독립운동가 및 문학가로서 민족근대문학에 기여했다는 점, 과오를 반성한 점 등을 인정해 용궁동 재북인사 묘역에 안장했다.

5.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38선 이북지역의 친일 청산을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프랑스에서의 나치협력자 청산과 비교해보면 어떨까?

프랑스는 법이 정비되기도 전에 이미 약식으로 8천여명이 처형되고 여성 나치부역자 2만여명의 삭발식이 진행될 정도로 나치부역 청산이 빠르고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법이 정비된 이후에는 프랑스 인구 116명 중 1명꼴로 부역자 혐의를 받았으며 12만여명이 재판을 받고 약 6천 700여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정계, 경제계, 문학계 등 각종 분야에서 대대적인 청산이 이루어져 4만명에 달하는 공무원, 직원, 행정직원들이 직업활동을 제한받고 금지당했다고 한다.

북한 역시 1945년말까지 일제 보안대에서 보안원 3,600명이 친일 경력 등 각종 이유로 면직되었는데, 이 수는 전체 보안원의 41.5%에 해당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유사하게 직업파면, 재판, 재산몰수, 선거권 제한 등을 중심으로 친일청산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처벌을 받아야 할 친일파 상당수가 남하하면서 프랑스처럼 대규모 사형판결과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주 북한 소련 민정국이 작성한 통계에 따르면, 1946년부터 1948년 8월까지 북한에서 남한으로 건너간 사람 수는 84,369명(1946년 – 44,175명, 1947년 – 30,471명, 1948년 – 8개월 9,723명)으로 집계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친일파들로 추산되고 있다.

– 계속-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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