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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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②

"천왕폐화께 한가지 바치옵는

정성이련만 총을 잡는 어깨는
보람이 차는 것을."
– 주요한(마쓰무라 고이치), <불놀이> 등의 작품으로 교과서에 기재된 시인. 훗날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역임. (이성광, "민중의 역사1", 기획출판 한, 228쪽)

해방 후 우리 민족의 염원은 친일 청산이었다.

친일 청산은 단순히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를 심판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조선사회에 만연했던 일제 잔재 전반을 청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친일 청산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북한에서 친일파를 숙청했다는 것 정도는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구체적인 시행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북한에서 친일청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친일파 청산 과정과 사회문화적 일제 잔재 청산 두 부분으로 확인해보도록 하자.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 노덕술.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친일파 경찰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냈다. 출처 : 인터넷.

 

[목차]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1. 해방, 그리고.

2.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출범

3. 중앙기구 차원에서 진행된 친일청산

 1) 재판소 사법절차에 따른 처벌

 2) 정치적, 경제적 조치 
  ① 토지개혁    ② 친일재산의 국유화와 노동자 자주관리 ③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 ④ 그 외  

4.친일파규정

 1) 친일파·민족반역자에 대한 규정

 2) 정준택, 이활, 그리고 이광수

5.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6. 일제유산 청산

7. 북한 친일청산의 특징

 1) 천편일률적이지 않았던 친일파 청산

 2) 친일파 청산만큼 중요하게 바라봤던 일제유산 척결운동

 3) 대중이 주인되었던 일제 잔재 청산

8. 친일청산의 결과

 


– 계속-

  2-2) 친일재산의 국유화와 노동자 자주관리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진행한 두 번째 친일청산은 중요산업의 국유화 및 노동자 자주관리화였다. (노동자자주관리제(Workers' self-management)란 사기업체의 기초적 의사 결정에 노동자가 직접 참여하는 것. 생산수단은 사회화-노동자 공동체나 전체 사회에 의해 소유된다. 노동자자주관리제에 대한 최초의 생각은 오웬, 푸리에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되었으며 현재 스페인 몬드라곤, 이태리 북부지역의 노동자협동조합의 번영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6년 8월 10일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을 발표한다. (출처 : NK조선, 법령)

산업, 교통운수, 체신(우편),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법령

일본제국주의는 조선인민을 노예화하며 대륙의 다른 나라 령토(영토)를 강점하고 그 나라 인민을 노예화하기 위한 군사적 기지와 경제적 토대를 닦을 목적으로 조선을 강점하고 36년 동안 식민지통치를 실시하였다.

일본강점자들은 조선에서 식민지통치를 시작한 첫날부터 조선의 경제를 자기의 제국주의적 리해(이해)관계에 예속시켰고 조선인민의 고혈로 많은 기업소, 발전소, 철도 등을 건설하였다.

조선이 일제식민지통치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조선인민에게 민주주의적 자유를 보장하고 조선인민의 공·사유재산을 보호하며 우리나라를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빨리 부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조성되였다.

조선인민을 착취하고 조선의 자원을 일본으로 빼앗아갈 목적으로 일제가 조선에 건설한 모든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 등은 반드시 조선인민의 소유로 되어야 할 것이며 우리나라의 발전과 조선인민의 생활향상에 리용(이용)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 등의 국유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법령을 발포한다.

일본국가와 일본 법인 및 사인의 소유 또는 조선인민족반역자의 소유로 되여 있는 모든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운수, 체신, 은행, 상업 및 문화기관 등을 모두 무상으로 몰수하여 이를 조선인민의 소유로 즉 국유화한다.

본 법령은 발포한 날부터 효력을 가진다.

1946년 8월 10일

법령에 따라 일본국가, 일본 자본가들, 친일파의 소유로 된 모든 기업, 광산, 발전소, 철도운수, 우체국, 은행, 상업 및 문화기관 등을 무상으로 몰수하였다.

그 수는 38선 이북 지역 산업의 90%에 달하는 1,034개에 달했다.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97쪽.)

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이 중요산업 국유화를 발표하던 모습. 출처 : 인터넷.

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당국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국유화는 토지개혁에 비해 상대적으로 간단한 문제였다.(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129쪽.)

그럼에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중요산업 국유화도 '철저한 무상몰수의 원칙' 하에 노동자 스스로가 주인이 되도록 하였다.

각 기업별로 노동자들이 조직한 공장위원회가 직접 몰수투쟁을 진행했으며 파괴된 공장, 기업들을 복구하여 생산을 정상화하기 위한 사업도 동시에 했다.

공장의 주인으로 나선 노동자들. 노동자 자주관리화가 이루어졌다. 출처 : 인터넷.

여기에서 거둔 성과가 중요산업국유화법령로 공고화되었고 이로서 일본자본, 친일파의 자본 청산은 완전히 이루어졌다.

중요산업국유화에 이어 1946년 11월에는 ‘북조선 산업 및 상업발전에 관한 법령‘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 각 도 인민위원회는 친일파의 부동산(건물, 토지) 뿐 아니라 동산(움직일 수 있는 재산)까지도 몰수했다.(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200쪽.)

그러나 친일파가 아닌 자본가들의 소유는 법적으로 보호해주었다.

'개인 소유권을 보호하며 산업 및 상업 활동에 있어서의 개인의 창발성을 발휘하기 위한 대책에 관한 결정서'(1946.11)가 채택되면서 민족 반역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 중소 상공업자들은 존속할 수 있었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1", 역사비평사, 2011년, 92쪽.)

김일성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은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중요산업의 국유화는 자주독립국가건설의 기초 라는 연설을 진행했다. 출처 : 인터넷.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 이 두 조치로 친일자본가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38선 이북 지역에 있던 친일파들의 경제적 기반을 모두 청산시킨 셈이다.

일반적으로 산업사회에서 기득권 세력에 대한 경제적 청산은 그들의 독점적 지위를 낮추는데 가장 위력적 방법이 된다.

36년간 일제에 빌붙어 배를 불려온 친일세력들은 38선 이북지역에서 일반 농민, 노동자들과 완전히 똑같은 경제적 수준을 갖게 되었다.

  2-3)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중앙정부)가 행한 마지막 조치는 바로 1946년 말, 1947년 초에 걸쳐 각급 지방인민위원회(도, 시, 군, 면, 리) 선거에서 이루어졌다. (1946년 11월 3일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1947년 2월 24~25일 리(동) 인민위원회 선거, 1947년 3월 5일 면 인민위원회 선거가 각각 진행되었다. 임영태, "북한50년사①", 들녘, 1999년, 124쪽.)

38선 이북 주민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근대민주주의의 대표적인 산물인 선거를 시행하게 된다.

보통, 직접, 비밀로 진행된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중앙정부)는 ‘북조선 군, 시 및 도 인민위원회 선거에 관한 규정’을 발표하게 된다.

선거에 대한 규정 제1장 제1조는 친일파들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제한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친일파의 선거참여 권리가 제한된 이유는 친일파의 정치세력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친일파 청산사업에 위기를 느낀 친일자본가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재산을 이용하여 돈으로 표를 매수하는 작업을 진행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38선 이남 미군정청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장악하기 위해 친일파들의 출마를 부추기고 선거비를 지원해줄 가능성도 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파들의 피선거권(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권리)를 막았다.

그리고 친일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친일파들의 선거권(선거할 수 있는 권리)도 제한했다.

이렇게 하여 전체 유권자 4,516,120명 중 친일파 575명은 1946~1947년 선거에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당하게 된다.

선거권이 박탈당한 친일파들은 북한 정계에 진출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친일파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후보에게 투표할 수 없었다.

일제시기 정치적 영향력이 높았던 친일파들은 북한 정계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대신 평범한 민중들이 농민 36.4%, 노동자 14.5%, 사무원 30.6% 비율로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투표율 99.68%, 국방성 중앙문서보관소 문서군 172, 목록 614631 문서철 20, 31쪽. 전현수, '1946년 북조선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사학연구 제115호", 2014년 9월, 199쪽.)

  2-4) 그 외

그밖에 사회적으로 친일파들에게 주어진 제약 중에는 사법기구로의 진출 금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201쪽.)

1946년 3월 6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법국 재판소·검찰소의 구성과 직무에 관한 기본원칙’이 발표되었고 이 원칙에 따라 친일파는 재판소·검찰소·교화소와 그 외 사법기관의 직원에 발탁될 수 없게 되었다. (제8조)

이 조항은 일제시기 판사나 검사의 직위에 복무한 자들이 사법국과 도 사법부 과장 이상의 직위 또는 판사에 발탁될 수 없다는 추가규정을 통해 한층 구체화된다.

이러한 조치는 일제시기 독립운동가들을 심판했던 수많은 판사, 검사들을 심판하기 위한 이유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참심원(형사사건에 참여하는 시민법관), 변호사가 될 자격 역시 가질 수 없었다.

이 역시 친일파들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법을 활용하거나 법을 이용하는 모든 행위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친일청산을 위해 진행한 조치들을 모두 받아들인 친일파들은 38선 이북 지역에서 살 수 있었다.

그 수는 1946~1947년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선거권·피선거권을 박탈당했던 575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조치에 반발한 친일파들은 모두 38선 이남으로 내려왔다.

미군정이 구성한 남조선의 임시기구인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구성원들 가운데 38 이북 지역으로부터 도피성 월남을 감행한 이들은 총 36명으로 총입법의원 90명의 40%에 이르렀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197쪽.)

제주 4.3항쟁에서 제주도민들을 학살해 악명 높았던 서북청년단도 북한의 토지개혁, 재산몰수 등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월남한 이북 각 도별 청년단체가 설립한 조직이었다.

– 계속 –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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