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왜?] 북한에서 친일파는 어떻게 청산되었을까?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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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투데이에서는 <북한은 왜?> 시리즈를 통해 북한의 현대사, 그리고 오늘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기 기획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천왕폐화께 한가지 바치옵는
정성이련만 총을 잡는 어깨는
보람이 차는 것을."
– 주요한(마쓰무라 고이치), <불놀이> 등의 작품으로 교과서에 기재된 시인. 훗날 제2공화국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역임. (이성광, "민중의 역사1", 기획출판 한, 228쪽)


해방 후 우리 민족의 염원은 친일 청산이었다.

친일 청산은 단순히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를 심판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 조선사회에 만연했던 일제 잔재 전반을 청산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친일 청산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북한에서 친일파를 숙청했다는 것 정도는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구체적인 시행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북한에서 친일청산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 친일파 청산 과정과 사회문화적 일제 잔재 청산 두 부분으로 확인해보도록 하자.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 노덕술.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친일파 경찰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냈다. 출처 : 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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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방, 그리고.

해방이 되자, 민족을 팔아먹으면서 자기 잇속을 차린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는 대중들의 요구는 뜨거웠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 독립운동가들. 출처 : 인터넷.

"우리는 예정대로 농민조직이 완료된 시점에서 면민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그토록 순박하고 말이 없던 농민들이 대회가 열리자 연단에 나와 지주들과 친일 앞잡이들의 친일행각을 낱낱이 폭로하는 게 아닌가. 자연히 기세 좋게 설치던 지주와 일제 앞잡이들이 낯을 못 들게 되었다. 이어서 선거로 풍산면의 일꾼을 뽑자는 안이 통과되었다. 곧이어 선거가 진행되었는데 우리 면의 나이 많고 양심적인 인사가 지주와 친일 앞잡이들을 물리치고 면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 풍산에서의 해방 모습 (이인모 기록, '전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 수기', (주)월간 말, 72~73쪽) 

1945년 8월 16일부터 25일까지 10일간 살해된 일본인 내지 친일파가 21명, 부상을 당한 자는 67명, 구타폭행을 당한 자가 118명에 달했을 정도였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198쪽)

이들은 총 206여명으로 당시 조선 전체의 일본인, 친일파 수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과 10일 만에 200여명이 신체적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일제 치하 36년간 쌓였던 우리 민족의 분노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반증하는 통계치였다.

직접적인 신체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주로 경찰관(54.4%, 112명), 면사무소 직원 (33.5%, 69명)이었다.

대중들은 주로 자신의 삶에 직접적 악영향을 미쳤던 악질 일본인, 친일파부터 청산하고자 했던 것이다.

대중의 분노를 감지한 조선인 경찰관들 중 80%는 8월 15일부터 미군진주일인 9월 8일 사이에 일을 멈추거나 쫓겨나거나 도망쳤다.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15쪽)

2. 건국준비위원회(인민위원회) 출범

해방 직후 우리나라 곳곳에는 자치기구인 건국준비위원회(훗날 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 따르면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적으로 145개 지부가 있었다.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13쪽)

일본경찰권력이 급속도로 무너졌기 때문에 인민위원회는 자체 치안대를 꾸려 각 지역마다 치안을 담당하도록 했다.

38선 이남의 경우 미군정의 진주 이후 인민위원회가 1945년~1946년 사이 모두 해체되었다.

38선 이북에 설치된 인민위원회는 그 존재가 계속 이어졌다. (지금 이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다.)

38선 이북 인민위원회들은 일본인 재산 접수, 노동관계, 소비문제, 소작료문제 뿐 아니라 친일파 청산 사업을 담당했다. 

강원도 고성에서 민족반역자 11명이 ‘군중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강원도 양양에서도 3명이 인민재판에서 교화형을 선고받았다. (군중재판 : 지역 인민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죄를 평가하고 심판하는 것. 교화형 :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 일반적으로 교도소가 범죄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기위해 만들어진 시설인 반면 교화소는 교육과 노동을 통한 단련이 주된 목표로 된다.)

이러한 재판은 각 지방 인민위원회 자체가 세운 법과 제도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3. 중앙기구 차원으로 진행된 친일청산

38선 이북 지역에서 인민위원회에 의해 자체적으로 진행된 친일파 청산은 1946년을 맞아 차츰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1946년 2월, 38선 이북에 각 지역 인민위원회들의 중앙기구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한 것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출처 : 인터넷.

  1) 재판소 사법절차에 따른 처벌

임시중앙정부가 꾸려지면서 국가차원으로 친일파청산을 담당할 검찰소, 재판소 등 사법기구의 조직이 건설되었다.

구속->입소->기소->재판->형 집행 등 사법절차가 친일파들에게 적용되기 시작했다.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199쪽)

  2) 정치적, 경제적 조치

친일 청산 사업은 단순히 친일파들을 법적으로 조사하고 처벌하는 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친일파들이 일제에 협력하여 수십년간 누린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박탈하는 것도 함께 진행되어야 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임시중앙정부)가 제시한 11개항의 정책 가운데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항이 '친일파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에 대한 박탈'과 관련된 사항이였다.

① 친일분자 및 반민주적 반동분자 숙청 
② 일본침략자 및 친일적 반동분자와 조선인대지주의 산림과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 반분소작제를 철폐, 농민에게 무상으로 토지 분여 
③ 생산기업소를 인민생활필수품에 소요되는 기업소로 전환 
④ 철도, 수운, 통신, 운수 등 회복 
⑤ 금융기관 체계 정리 
⑥ 중소기업의 개량과 발전 
⑦ 노동운동의 적극 방조 
⑧ 인민교육제도의 민주주의적 개혁 
⑨ 민주주의적 인민 교양 
⑩ 식량문제 대책 수립 
⑪ 모스크바 결정의 진의의 정확한 해석

친일청산 문제가 정책의 가장 앞에 배치되어 있었던 만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친일청산에 가장 많은 역량을 쏟았다.

김일성 당시 북조선임시인민위원장은 공산당이 주도하기보다는 대중이 주체가 되어 친일파를 척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189쪽)

따라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모든 절차에서 대중이 주인으로 설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하여 진행된 친일청산은 크게 3가지로 이루어졌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1", 역사비평사, 98~100쪽)

   2-1) 토지개혁

첫 번째로 진행한 것은 바로 토지개혁이었다.

북한의 토지개혁 구호. 토지는 농민의 것이라고 쓰여져 있다. 출처 : 인터넷.

토지개혁 전 38선 이북지역은 순소작농이 50%, 자작 겸 소작농 30%를 차지할 정도로 농민 대부분은 소작의 굴레에 얽매여 있었다.

1946년 3월 5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을 발표하였다.

법령은 토지를 이용하는 권리는 기본적으로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에게 있다는 것(경자유전,耕者有田)을 선포한 것이었다. (경자유전 : 대한민국 헌법 제121조에도 있다. 밭 가는 사람이 밭을 가진다는 뜻.)

그리고 토지의 몰수 방법과 분배의 원칙도 규정했다.

– 일제가 소유했던 토지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의 소유지 및 5정보(1만5천평) 이상을 가진 지주의 토지, 계속 소작을 주고 있던 모든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한다.

– 몰수한 토지는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주어 그들의 소유로 한다.

– 농가의 가족인원, 일할 수 있는 사람수에 따라 토지를 분배하여 분여된다.

– 토지의 매매, 저당, 일체 소작제도를 금지한다.

– 몰수한 산림, 관개시설, 과수원 및 농민들이 경작하기 힘든 일부 토지를 국유화한다.

토지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선택한 방법은 각 지역마다 토지개혁을 담당할 기구를 수립하여 대중의 힘으로 이뤄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 소작농, 고농(농업노동자)들로 1만 1,500여개의 농촌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농촌위원회는 단 26일 만에 북한 전역에서 대지주, 친일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분배하게 된다.

대다수 농민들의 열광적인 지지와 활동으로 세계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토지개혁이 이루어진 것이다.

토지개혁 결과 38선 이북지역의 총 100만 325정보(약 30억평, 9921㎢)의 토지가 몰수되었고 경작하기 힘든 땅을 제외한 98만 1,390정보의 토지가 72만 4,522호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분배되었다. (

김재웅, '해방후 북한의 친일파와 일제유산 척결', "한국근현대사연구 2013 가을호", 200쪽.)

땅을 빼앗기게 된 대지주 및 친일지주들은 토지개혁을 방해하기 위해 유언비어를 유포하고 농촌위원회를 파괴하고자 했다.

심지어 38선 이남과 연계하여 테러활동이 준비되기도 했다. (김성보, “북한의 역사1”, 역사비평사, 98~100쪽)

그럼에도 토지개혁은 수천년간 간직해온 농민들의 세기적 숙망을 실현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세를 막을 순 없었다.

토지개혁 이후 농민 100%가 모두 자작농이 되었고 친일파, 민족반역자를 포함한 4만여명의 지주는 몰락했다.

이로서 친일파 지주들의 주된 경제적 기반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 계속 –

 

김혜민 기자  NKtoday21@gmail.com    ⓒNK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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